꽃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무엇이 되고 싶은 우리
우리는 가끔 이세상을 살면서 홀로 남겨진듯한 기분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물리적으로는 분명히 존재하는 나(Myself)라는 존재가 수많은 사람들이 공존하는 이 세상에서 나(Myself)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사람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상상해보자 그런 세상에서도 나라는 존재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영화 그래비티는 공기도 소리도 없는 정적의 무대에서 극한의 공포와 외로움속으로 한 인간은 던져 넣는다.
무한한 공간과 어둠으로 이어진 우주공간속에서 홀로 남겨진 한 인간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그곳은 마치 80억의 인간이 살고 있는 이세상에서 혼자 남겨진 듯한 모습과 많이 달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정확히 같은 모습을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본다.
그 어둠의 공간을 떠돌다 들려오는 동료가 부르는 목소리에 다시금 존재가치를 되뇌이며 살고자 하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결국 자신이 존재하는 그 어떤 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모습에서 <김춘수>의 '꽃'이라는 '마스터피스'가 떠오른다.
나 라는 존재의 증명
우리는 분명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이라도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증명하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관계를 갖고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며 홀로 '존재한다가 아닌' 둘 이상의 사이에서 존재한다고 서로 인지해주고 찾아줄 때 비로소 사이에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양자역학에서 양자들의 위치와 속도등은 알 수가 없다. 측정하기 전에는 말이다. 분명히 그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알고는 있지만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도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다. 이 괴상한 학문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모든 시대의 기술들을 가능 캐 했으며 실제로 그렇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어디엔가 있는 양자가 내가 직접 불러주어야만(전자등을 쏘아서 탐지해야만) 그곳에 있다는것을 알 수 있다는 양자역학. 그 이론으로 만들어낸 현대사회가 양자역학적으로 관계해야만 인간도 존재의 증명을 할 수 있다는 이론, 김춘수의 꽃이 들려주는 아름다움, 그리고 영화 그래비티를 보며 느끼는 감동들은 이 우주를 가로지르는 진리의 다른 모습들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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